초안입니다. 완결된 신조가 아닙니다.
주일에 우리는 「우리는 평화의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서에는 도시 전체를 몰살하라는 명령도 있고, 적의 아이를 바위에 메어치는 자가 복이 있다는 시편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평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 한쪽을 따르기로 한 것입니다.
까닭
이 문서는 그 선택을 적어두기 위한 것입니다.
설교에서 다 말할 수 없고, 토론 모임에 모두가 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 한 번 적어둡니다. 우리가 무엇을 골랐고, 무엇을 옆에 두었고, 왜 그랬는지를.
방향
우리는 성서를 생명, 평화, 자유의 방향에서 읽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원래 그런 분이다」라는 설명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읽기로 했다는 고백입니다. 사도신경이 「나는 믿습니다」로 시작하는 것과 같은 문법입니다.
이 구분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정의해버리면 아무도 다시 물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골랐다고 말하면, 언제든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읽는 법
예수께서 읽으신 대로 읽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성서 위에 있는 정답으로 두지 않습니다. 성서를 읽는 방식으로 둡니다.
예수를 정답으로 두면, 구약을 예수로 채점하게 되고, 구약은 미완성이 되며, 우리는 답을 가진 쪽이 됩니다.
예수를 방식으로 두면, 예수께서 하신 방식으로 성서를 읽게 되고, 예수도 이 성서 안에서 읽으셨다는 사실이 남으며, 우리도 계속 읽어야 하는 쪽이 됩니다.
산상수훈의 「옛 사람에게 말한 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는 성서를 버리는 말이 아닙니다. 인용하고, 다시 쓰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권한은 예수께서 새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토라 안에 있었습니다.
레위기 10장에서 아론은 규정을 어깁니다. 아들 둘이 방금 죽어 제물을 먹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문책하고, 이유를 듣고, 받아들입니다. 문자대로가 아니었는데도.
유대 학자들은 이 대목을 토라의 핵심으로 봅니다. 여기서 「구하다(다라시)」라는 말이 두 번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맹목적으로 복종하지 말고 그 뜻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법끼리 서로 모순되는 곳도 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이 4대까지 벌하신다고 하고, 신명기 24장 16절은 각자 자기 죄로 벌받는다고 합니다. 둘 다 동시에 지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해석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을 우리도 계속해야 합니다.
본문
추상적인 말은 되돌아갈 곳이 있어야 합니다. 아래가 그 자리입니다.
부활 고백에는 겟세마네와 십자가의 절규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외침을 빼고 부활만 말하면, 그것은 「결국 다 잘 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지금 무너져 있는 사람에게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소외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잔인하다고 고발하면서 동시에 「나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심을 아노라」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을 거스르면서까지. 십자가의 절규는 그 계보에 있습니다.
옆에 둔 것
숨기지 않기 위해 적습니다. 이 본문들은 성서 안에 있고, 우리의 방향과 다른 말을 합니다.
신약 본문이 목록의 3분의 1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눈여겨봐 주십시오.
「구약은 폭력적이고 신약은 사랑」이라는 통념은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원한 형벌이라는 관념은 구약에 없습니다. 구약의 심판 본문은 하나님과 인간 양쪽 모두에게 회개의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우리는 이 본문들을 성서에서 빼지 않습니다. 없는 척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예배에서 해설 없이 낭독하지 않습니다. 특히 시편 137편 8~9절과 에스겔 16장은 전례에서 읽지 않습니다. 이 본문들의 화자가 서 있던 자리와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억눌린 사람의 절규를 힘 있는 사람이 낭독하면 그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근거
이 선택에는 세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성서는 한 사람이 한 번에 쓴 책이 아닙니다. 나중 세대가 앞 세대의 글을 고치고 반박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 작업의 연장입니다.
산상수훈은 성서를 버린 것이 아니라 다시 쓴 것이고, 그 권한은 레위기 10장에서 왔습니다.
여호수아기는 실제로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과 남아프리카의 인종 차별을 정당화하는 데 쓰였습니다. 성서가 어떻게 읽히는가는 학문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목숨이 걸린 문제입니다.
위험
이 방향이 잘못 쓰일 수 있는 지점을 미리 적어둡니다.
방향을 정하면 그것이 우리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될 위험이 생깁니다.
「우리는 평화의 편」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 안의 폭력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 방향은 바깥을 겨누기 전에 우리 공동체의 갈등 처리 방식, 재정 집행, 내부의 위계를 먼저 심판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그것은 방향이 아니라 방패입니다.
출애굽 이야기에서 이집트는 민족 이름이 아니라 사람을 벽돌로 만드는 체제의 이름입니다. 성서 자신이 그렇게 읽히지 않으려고 장치를 붙였습니다. 모세를 살린 것은 파라오의 딸이었고, 산파들은 왕의 명령을 어겼으며, 토라는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신명기 23장 7절)고 명령하고, 이사야는 이집트를 「내 백성」이라 부릅니다.
어떤 사람 집단을 이집트라고 부르는 순간 이 방향은 그 반대편으로 넘어갑니다.
출애굽에는 이집트의 첫째 아들들이 죽는 장면이 있습니다. 해방 이야기는 피해자 없이 쓰이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을 지우면 우리는 우리가 반대하던 자리에 서게 됩니다.
부활 고백은 지금 무너져 있는 사람을 위한 말입니다. 이미 서 있는 사람이 그 말을 하면 방향이 뒤집힙니다.
절규를 뺀 부활은 결국 응보 신학입니다. 착하게 견디면 좋아진다는 것. 성서의 욥기와 전도서가 정면으로 반대한 생각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말할 때, 겟세마네와 십자가의 외침을 함께 말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구약은 예수 안에서 완성되었다」고 말하는 순간, 유대교는 결핍 상태가 되고 우리는 답을 가진 쪽이 됩니다. 이 논리가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는 역사가 보여줍니다.
첫 세대 그리스도인들의 성서는 전부 구약이었습니다. 예수께서도 그 안에서 읽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봄
이 문서는 완결된 신조가 아닙니다.
해마다 한 번, 「위험」만 따로 점검합니다. 우리가 실제로 그 자리에 서 있지 않은지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옆에 둔 것」 목록도 계속 늘어날 것입니다. 아직 우리가 다루지 못한 본문이 많습니다.
우리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되면 말씀해 주십시오.
다시 볼 수 없는 방향은 방향이 아니라 우상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다 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답을 주기보다 질문을 던지고, 우리가 너무 확실하다고 믿는 것을 흔듭니다. 그 흔들림을 견디는 것이 신앙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다만 그 앞에서 아무 방향도 정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함께 살아야 하고, 매주 무엇인가를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합니다. 선택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