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0. 시작하기 전에 · 1. 목표부터 — 신앙 활성화에 +1 · 2. 정의 — 주체성이 함께 형성되는 자리 · 3. 기능 — 네 가지 · 4. 효과 — 관찰된 것만 · 5. 나눔질문 — 설교 다음에 오는 것 · 6. 유의할 점 · 7. 마무리
본문
# 설교란 무엇일까
*2025년 중반 ~ 2026년 중반 길섶교회 설교 기록을 토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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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시작하기 전에
오늘 이야기는 좀 애매한 주제입니다. 왜 그러냐면 설교론이라는 게 신학 안에서 딱 정리된 분야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먼저 어디까지가 어디인지 좀 갈라 놓고 시작할게요. 이거 안 하면 제 취향을 그냥 정답처럼 말하게 되는 문제가 생겨서요.
① 대체로 합의된 것 설교는 성서 텍스트를 공동체 앞에서 해석해서 말하는 행위다. 이건 보수든 진보든 가톨릭이든 다 동의합니다. 여기까진 싸울 게 없어요.
② 지금도 논쟁 중인 것 그게 "선포"냐 "해석"이냐 "대화"냐. 신학교마다 다르고 목사님마다 다릅니다. 정답이 없는 영역이에요.
③ 제 입장 아래 나오는 건 전부 여기입니다. 저희 교회 1년치 기록을 실제로 살펴보고 정리한 건데, 이게 맞다는 게 아니라 저희는 이렇게 하고 있더라에 가깝습니다. 안 그래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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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표부터 — 신앙 활성화에 +1
정의보다 목표를 먼저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목표가 정해져야 방법이 나오니까요.
설교의 목표는 듣는 분의 신앙이 한 칸 활성화되는 것. +1.
저희가 나눔질문에서 자주 쓰는 표현이죠. "마음의 온도가 +1 되는 본문", "신앙인의 주체성에 +1이 되는 것들." 설교도 같은 단위로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여기서 좀 중요한 게 있는데, +1이지 +10이 아니라는 겁니다. 한 번의 설교로 누군가의 신앙이 완전히 바뀌는 일은 잘 없어요.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긴 한데 저는 좀 회의적입니다. 그리고 그런 걸 목표로 잡으면 설교가 이상해집니다. 감정을 몰아붙이거나 결단을 요구하는 쪽으로 가게 돼요.
그래서 매주 +1이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어떤 주는 0일 수도 있고요. 그것도 괜찮아요.
그럼 활성화가 뭐냐. 저는 이렇게 봅니다.
"자기 신앙의 주체가 되는 쪽으로 한 칸 움직이는 것."
성경을 스스로 해석해보게 되는 것, 내 삶에 대한 질문을 내가 던지게 되는 것, 남이 정해준 답 말고 내 답을 만들어보려는 시도. 이런 게 활성화 같아요.
반대로 비활성화도 있습니다. 설교 듣고 "아 그렇구나" 하고 끝나는 거요. 정보는 늘었는데 자기가 움직일 여지는 줄어드는 상태. 신학 공부를 많이 한 설교자일수록 이쪽으로 갈 위험이 큽니다. 아는 게 많으면 자꾸 정리해주고 싶어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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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의 — 주체성이 함께 형성되는 자리
목표가 그렇다면 정의는 이렇게 나옵니다.
설교는 설교자와 듣는 사람의 주체성이 함께 형성되는 자리다.
여기서 "함께"가 핵심입니다. 일방향이 아니에요.
작년 7월에 돌봄 설교를 하면서 이런 결론을 냈었어요. 일방향 돌봄은 장기적으로 우정이 안 된다고요. 한 사람이 계속 주고 한 사람이 계속 받으면, 주는 쪽도 지치고 받는 쪽도 부담스러워집니다. 서로 다른 걸 주고받는 순환이 생겨야 관계가 유지돼요.
설교도 똑같은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계속 채우고 나머지가 계속 받는 구조는 오래 못 갑니다. 받는 쪽의 주체성이 자라지 않고, 주는 쪽도 결국 소진돼요.
그래서 제가 다 채우지 않으려고 합니다. 근데 이게 목표는 아니에요. 비우는 게 좋아서가 아니라, 제가 다 채우면 그 자리에서 다른 분이 자기 해석의 주체가 될 기회가 없어지니까 그러는 겁니다.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게 저한테도 적용됩니다. 제가 매주 준비하면서 뭔가 움직여요. 그러니까 설교는 저도 +1 되는 자리입니다. 그게 안 되면 그냥 반복 작업이 되는 거죠.
저희 예배 순서를 보면 "성서-말씀 나눔 (설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두 이름을 나란히 씁니다.
"설교"를 안 쓸 수는 없어요. 밖에서는 다 그렇게 부르니까요. 근데 앞에 이름을 하나 더 붙인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이픈을 넣은 이유. 그냥 "말씀 나눔"이라고 했다가 바꿨어요. 왜 그러냐면, 제가 하는 말을 "말씀"이라고 부르는 게 되잖아요. 저 스스로를 높이는 것 같아서 좀 그렇더라고요. 제가 말하려던 건 성서 말씀이었거든요. 그래서 성서-말씀으로 붙였습니다.
"성경" 대신 "성서"인 이유. 경(經)이라는 글자는 그 종교 안에서 텍스트를 좀 높이는 뉘앙스가 있어요. 불경, 도덕경 이런 식으로요. 저희는 그것보다 우리 신앙의 책이라는 느낌으로 쓰고 싶어서 성서로 갑니다. 이건 취향 문제라 다르게 생각하셔도 됩니다.
"나눔"인 이유. 이게 제일 중요한데요.
성서 본문에 대해, 설교자 자신이나 우리 공동체가 추천하는 하나의 해석과 실천을 공유하는 것.
여기 단어 세 개를 좀 봐주세요.
그러니까 나눔이라는 말은 겸손 떨려고 붙인 게 아니고요, 실제로 하는 일이 그거라서 붙인 겁니다. 공적인 신학 담론을 가져오되 거기에 제 주관적인 경험과 해석을 합치는 거죠. 그리고 이걸 준비할 때 마음은 하나예요 — 오시는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신앙 효과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것. 앞에서 말한 +1입니다.
이름을 이렇게 잡아 놓으면 좋은 게 있는데요. 다른 분이 설교하기가 쉬워집니다. "설교하세요"는 부담스럽잖아요. 근데 "본문 하나 골라서 자기 해석이랑 실천을 나눠주세요"는 좀 다르거든요. 5:5로 가려면 이 차이가 꽤 중요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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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능 — 네 가지
목표(+1)와 정의(함께 형성)에서 기능이 따라 나옵니다.
고대 세계와 지금 사이에 2천 년이 있잖아요. 이 낙차를 못 넘으면 활성화가 시작되지도 않습니다.
저희 1년치를 보면 이런 게 반복됩니다. 바리새파는 이중직 목회자, 제사장 문서는 예배 순서 고민하는 목사, 신명기 사관은 "너 큐티했어? 몇 시 일어났어?", 성서 편집 층위는 포토샵 레이어, 애굽은 알고리즘.
재밌는 건 이걸 하다 보면 웃음이 나온다는 거예요. 근데 그게 유머를 넣으려고 한 게 아니고 번역하다 보니 낙차에서 저절로 나오는 겁니다. 웃기려고 애쓸 필요는 없어요.
이게 주체성이랑 직결됩니다.
성서 이야기 중에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게 있고, 학자들 사이에 합의된 게 있고, 아직 토론 중인 게 있고, 그냥 제 해석인 게 있어요. 이걸 섞어서 말하면 어떻게 되냐면, 듣는 분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제 취향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걸 모르면 판단을 못 하고, 판단을 못 하면 주체가 될 수가 없어요. 그냥 저를 믿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까지는 학계 이야기고요, 여기부터는 제 생각입니다" 이런 말을 좀 자주 합니다. 쉽게 말해서 가스라이팅 좀 덜 당하시라고 그러는 거예요.
이거 안 하면 무슨 문제가 생기냐면, 나중에 그분이 다른 데 가서 "우리 목사님이 그러는데"로 시작하는 말을 하게 되는데, 그게 사실인지 제 의견인지 본인도 모르는 상태가 되잖아요. 저는 그게 좀 무섭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건 비우는 게 아니라 들어올 자리를 만드는 겁니다. 저희 1년 기록에서 실제로 이렇게 작동하고 있었어요.
포인트는 뭐냐면, 자리를 만드는 건 겸손이나 게으름이 아니라 활성화의 조건이라는 겁니다.
설교의 결과물이 "그래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가 아니라 "이런 재료가 있으니 각자 소화해보세요"에 가까웠으면 좋겠어요.
저희 1년치 설교 결론을 다 뽑아봤는데 대체로 이런 형태였습니다 — 움직이자, 내려놓자, 넓혀보자. 방향은 있는데 내용은 각자 채우는 구조. 결론을 주면 소화가 안 되고, 재료를 주면 소화가 일어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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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효과 — 관찰된 것만
여기서 좀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1이 됐는지 측정하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반응이라는 게 대체로 비슷비슷해요. 좋았다는 분도 있고 어려웠다는 분도 있고. 그래서 "이 설교가 잘됐다" 같은 말은 저는 못 하겠습니다.
다만 1년치를 놓고 보니까 구조적으로 관찰되는 차이는 좀 있었어요.
먼저 좀 인정하고 갈 게 있어요.
30분 얘기해도 다음 날 남는 건 거의 없습니다. 이건 설교자가 못해서가 아니고요, 원래 말이라는 게 그래요. 여러분도 지난주 유튜브에서 본 것 중에 지금 기억나는 게 몇 개나 되나요? 저는 거의 없습니다.
근데 이걸 인정 안 하면 무슨 문제가 생기냐면, 자꾸 많이 넣게 됩니다.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도 중요하니까 다 넣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냐면 더 안 남습니다. 제 1년치 설교 중에 제일 열심히 준비한 것들이 오히려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방향을 좀 바꿔야 할 것 같아요. 다 남기려고 하지 말고, 하나만 남기자.
1년 지나서 실제로 남은 게 뭐였냐면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셋 다 공통점이 있어요. 본문 안에 있는 단어 하나입니다.
왜 이런 게 남을까 생각해봤는데, 짧아서인 것 같아요. 설명은 못 외워도 단어 하나는 들고 나갈 수 있잖아요. 그리고 그게 남으면 그 주 내내 혼자 굴려볼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뭐에 삼켜져 있지?" 이 질문은 예배 끝나고도 할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1은 설교 시간에 일어나는 게 아니라 그 주 내내 일어나는 것 같아요. 설교는 그 한 주 동안 굴릴 게 하나 생기면 자기 몫을 한 거고요.
반대로 책이나 이론에서 시작한 회차는 내용이 나쁘지 않았는데도 남는 게 없습니다. 이유가 두 가지인 것 같은데요. 하나는 이론은 설명이 길어서 한 단어로 압축이 안 됩니다. 다른 하나는 이론에서 시작하면 본문에 도달하는 게 설교 중반 넘어서라, 회수할 시간이 없어요.
그래서 요즘은 준비할 때 이걸 먼저 정해보려고 합니다 — "다 잊어버려도 이거 하나는 남았으면 좋겠다, 하는 게 뭐지?"
7월 26일 돌봄 설교에서 제가 이런 말을 했더라고요. "돌봄이 제가 정서적으로 굉장히 별로거든요. 제 스타일은 아닌데 듣고 보니까 좀 설득돼서 가져오는 거예요."
이 회차가 다른 회차랑 구조가 좀 달랐습니다. 제 노동, 제 회비, 제 관계의 부담이 본문 해석의 재료로 들어가 있어요. 그러니까 제가 +1 된 걸 그대로 보여준 회차입니다.
반면에 제가 이미 동의하고 있던 이론을 소개한 회차들은 전달 구조예요. 나쁘다는 게 아니라, 저는 그 주에 안 움직였다는 거죠. 제가 안 움직인 걸 남한테 움직이라고 하는 건 좀 이상하긴 합니다.
그래서 요즘 생각하는 게, 세미나 주제 고를 때 제가 좀 싫어하는 주제를 일부러 넣어보면 어떨까 싶어요. 편한 주제보다 불편한 주제가 설교로는 나을 수 있다는 건데, 좀 역설적이긴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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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눔질문 — 설교 다음에 오는 것
앞에서 설교는 휘발성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뭐가 안 휘발되게 하냐가 문제인데, 저희는 그걸 나눔질문이 맡고 있는 것 같습니다.
1년치를 세보니 200개쯤 되더라고요. 매주 3~4개씩요. 그런데 이게 아무렇게나 만든 게 아니라 대체로 같은 순서였어요.
| 순서 | 하는 일 |
|---|---|
| 1번 | 개인 경험 꺼내기 — "~한 적이 있다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
| 2번 | 오늘 설교 검토하기 — "설교자 이야기 어떻게 생각하세요?", "장단점은?" |
| 3~4번 | 우리 공동체에 적용하기 — "길섶은 뭘 해볼 수 있을까요?" |
제일 중요한 게 2번이에요.
설교가 끝나고 바로 "오늘 이야기 어떻게 생각하세요"를 묻잖아요. 그러면 방금 들은 게 결론이 아니라 검토 대상이 됩니다. 이게 없으면 설교는 그냥 정답이 되거든요. 아무리 제가 "안 믿어도 됩니다"라고 말해도, 물어보는 절차가 없으면 실제로는 정답으로 남습니다.
말로 하는 것보다 절차로 만드는 게 훨씬 셉니다.
설교는 한 사람이 30분 말하는 시간이고, 나눔은 여러 사람이 각자 말하는 시간이에요. 같은 예배 안에서 발화 구조가 뒤집힙니다.
저는 이게 주체성 얘기랑 직결된다고 봅니다. 자기 생각을 소리 내서 말해봐야 그게 자기 생각이 되거든요. 머릿속에만 있으면 아직 남의 말이에요.
앞에서 +1은 설교 시간이 아니라 그 주 내내 일어난다고 했는데, 나눔질문이 그 다리 같아요.
"나는 지금 뭐에 삼켜져 있지?" 이런 질문 하나를 들고 나가면 화요일에도 목요일에도 떠오릅니다. 설교는 휘발되는데 질문은 좀 남더라고요. 문장보다 질문이 오래 가는 것 같아요.
1번 질문이 그 역할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 들으면 뭐가 떠오르세요?" 이건 오늘 처음 오신 분도 답할 수 있잖아요.
만약 첫 질문부터 "편집비평 관점에서 이 본문은"으로 시작하면 그 자리에서 이미 나뉩니다. 아는 사람만 말하고 나머지는 듣게 돼요. 그럼 앞에서 말한 ②가 무너집니다.
이건 좀 저희만의 특징인데, 나눔질문에 이런 게 종종 들어갑니다. "소모임 운영 아이디어가 있다면?" "워크샵에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그러니까 교회를 어떻게 운영할지가 예배 안에서 결정됩니다. 따로 회의를 잡을 여력이 없어서 시작한 면도 있는데, 하다 보니 이게 나쁘지 않더라고요. 신앙 이야기랑 운영 이야기가 분리되지 않는 게 오히려 맞는 것 같기도 하고요.
질문 개수. 4개 내면 하나도 제대로 못 다룹니다. 저도 자주 그럽니다. 2개면 충분할 때가 많아요.
난이도 층위. 40주 나온 분과 오늘 처음 온 분이 답할 수 있는 범위가 완전히 다릅니다. 1번은 누구나, 뒤로 갈수록 심화 — 이걸 좀 의식적으로 배치하면 좋겠습니다.
유도 질문 조심. "~하지 않을까요?"로 끝나는 질문은 사실 답이 정해져 있어요. 그건 나눔이 아니라 확인입니다. 저도 가끔 그러고 있더라고요.
온라인 참여자. 오프라인에서는 자연스럽게 돌아가는데 온라인은 끼어들 타이밍을 못 잡습니다. 채팅으로 먼저 받는다든지 방법이 필요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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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유의할 점
모든 설교는 어딘가에서 시작합니다. 저희 1년치를 보면 네 가지였어요.
| 시작 지점 | 결과 |
|---|---|
| 본문 어휘 | 본문 분량 많고, 포인트 하나가 남음 |
| 번역본 비교 | 위와 비슷 |
| 본문 서사 재현 | 위와 비슷 |
| 이론·책 소개 | 본문 분량 절반 이하, 남는 게 없음 |
이론이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저는 이론 좋아합니다. 근데 이론에서 출발하면 본문이 예시로 밀린다는 게 데이터로 나오더라고요.
매주 준비 첫 단계를 이렇게 잡아보시면 좋겠어요 — "이번 본문은 어디서 시작하지? 그리고 뭐 하나만 남기지?" 셋 다 안 되면 본문을 바꾸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시험 들면 활성화가 아니라 이탈이 되니까요.
폭력 본문 다룰 때 저는 이런 절차를 밟더라고요.
오늘 좀 어렵습니다 → 처음 들으면 시험 들 수 있어요 → 영양제라고 생각하고 → (중간에) 난이도 괜찮으세요? → 이상하면 피드백 주세요
그런데 재밌는 게, 이걸 여호수아 같은 데선 꼬박꼬박 하는데 푸코나 한병철 할 때는 안 하고 있었어요. 근데 듣는 분들 입장에선 후자가 훨씬 어렵잖아요. 안전장치를 필요 없는 데 깔고 있었던 거죠.
저는 인물의 심정을 상상해서 서술하는 걸 잘 못 합니다. 리스바 설교 준비할 때도 그 어머니 마음이 어땠을지를 제가 쓰진 못했어요. 다른 분 설교문을 가져와서 소개했습니다.
슬픔, 상실, 탄식의 언어도 마찬가지예요. 1년치에서 그게 제대로 나온 건 한 번뿐이었습니다.
이게 노력하면 되는 문제인가 하면, 제 생각엔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못 하는 방식으로 +1 되는 분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니까 편성으로 푸는 게 맞습니다. 5:5로 가려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이건 제가 자주 쓰는 검증법인데요.
여러분 친구가 "성경에 나오는 그 학살 이야기는 뭐냐"고 물었을 때, "그건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신 거야"라고 답한다고 쳐요. 그러면 그 친구가 여러분을 보는 눈빛이 좀 흔들릴 겁니다.
신학적으로 정교한지보다 이 테스트가 더 실용적일 때가 많아요. 여러분의 풍성한 친구 관계를 위해서라도 한 번씩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저희 1년치 제목을 보면 물음표가 32%, 콜론 부제가 57%예요. "~할 수 있을까?", "~는 왜 그랬을까?" 이런 거요.
이게 유튜브에는 좋습니다. 검색도 잘 되고 클릭도 되고요. 근데 문제는 뭐냐면, 설교 내용은 다 실천 요구형이었다는 거예요. 움직이자, 내려놓자, 넓히자. 제목이 내용을 안 보여주고 있는 거죠.
예배용 제목이랑 업로드용 제목을 분리해도 되겠다 싶습니다.
이건 제일 조심하는 부분인데요.
설교자가 신학 공부를 좀 하면 아는 게 많아집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게 맞는 해석입니다" 쪽으로 가게 돼요. 근데 그 순간 듣는 분들은 해석의 주체에서 소비자로 내려앉습니다. 정보는 +1인데 주체성은 −1이 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이런 문장을 자주 씁니다. "다 외울 필요 없어요." "이거 안다고 신앙에 도움 되는 건 아닙니다." "저는 이렇게 보는데 안 그러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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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마무리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름 — 성서-말씀 나눔 (설교). 추천하는 하나의 해석-실천을 공유하는 것 목표 — 듣는 분의 신앙 활성화에 +1 정의 — 설교자와 듣는 사람의 주체성이 함께 형성되는 자리 방법 — 다 채우지 않기 (목적이 아니라 조건) 전제 — 설교는 휘발됩니다. 그러니 포인트 하나만 남기기 나눔질문 — 설교를 검토 대상으로 되돌리고, 그 주 내내 굴릴 질문을 남기는 자리 유의할 점 — 시작 지점 정하기 / 안전장치 배치 / 못 하는 것 인정 / 친구 테스트 / 제목과 내용 맞추기 / 정답 주지 않기
근데 이거 다 제 입장입니다. 저희 교회 1년치를 놓고 정리한 거라 다른 공동체에는 안 맞을 수도 있고, 심지어 저희 안에서도 다르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거예요. 그럼 그게 더 좋습니다. 그 얘기를 좀 들려주세요.
한 가지만 덧붙이면, 1년치를 정리하면서 확인한 게 있어요. 가장 좋았던 순간들은 대체로 제가 말을 줄인 자리에서 나왔습니다. 근데 그게 제가 물러났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 주에 저도 뭔가 배웠거든요.
그러니까 결국 목표는 이겁니다. 매주 몇 사람이 각자 +1 되는 것. 그중에 저도 한 명 포함해서요.